[그 곳] 5. 연민, 변명
12월 말.
이모에게 생전 처음으로 편지를 쓰다가 눈물이 터졌다. 해맑게 이 곳의 행복한 시간만을 전하려고 했는데 너무도 자동적으로 순식간에 과거의 고통스러웠던 그 시간들과, 뿌리 깊은 죄책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고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었던 한도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심리적인 역량 내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만하면 됐는데, 뭐가 이다지도, 아니 아직까지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기분이 좋지 않다.
대단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대단한 위치에 오른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을 해낸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대체 무엇에 그렇게 쫓기듯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 버린 돌덩이 마냥 세상의 온갖 힘겨움을 짊어 안은 것처럼 살았을까.
이 서러움의 눈물 속에는 그 시간을 과연 이모가, 가족들이, 이해를 할까 하는 서운함이 가득하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나는 왠지 온갖 잘못을 혼자서 다 저지른 아이마냥 무섭고 공포스럽다.
그냥, 그 시간을 보낸 것이 나는 힘이 들었으니까, 조금 쉬도록 하겠다, 라고 가볍게 말하면 되는데. 그냥, 그 때에는 내 마음 하나 돌보기 힘들어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노라고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너는 잘못한 것이 없고 지금도 잘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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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다가오면서 괜시리 생전 하지 않던 카드 만들기가 하고싶어 졌었다. 카드를 보내고 싶은 이들의 숫자가 매우 많았는데, 막상 재료를 사고 하나 둘 카드를 만들고 편지를 쓰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고 자연스레 명단도 줄어들었다. 정말 쓰고 싶은 이에게 쓰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 다했다(사실 카드를 만들고 꾸미는 것에 너무 에너지를 쏟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왜냐면 나는 손으로 만들어 내는 것은 대부분 못하기 때문).
나는 그들에게, 그러니까 내가 이 행복하고 여유롭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충만한 이 시간들을 은근슬쩍 혹은 대놓고 자랑을 하여도 진심으로 축하해줄 것 같은 그들에게, 장문의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신기하게도 모든 이에게 다 다른 내용의 글을 썼다. 수다가 고팠나 보다. 내가 있던 곳에 내 주변에 항상 있던 그들이 무척이나 그리웠다.
성인이 되고 난 후 왕래가 거의 없었던 친척 어른 두 분에게 카드를 썼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항상 한결 같던 분들이다. 아직도 나의 어린 시절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리고는 흐뭇해하는 분들이다. 그들에게 내가 왜 이렇게 훌쩍 떠나야 했는지 어느 정도 설명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러다, 굉장히, 복받치는 감정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것들이 올라왔다. 나에 대한 연민, 그들에 대한 미안함, 죄의식, 억울함, 그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밀려왔던 것 같다.
모르겠다. 그 이후로도 나는 강도는 약하지만 비슷한 종류의 감정을 종종 느껴왔다. 'where am i, who am i, what the hell am i doing here, why am i like this???' 'I deserve it, it's 'the' time necessary for my life' 의 충돌로 인한 그 기분 나쁜 감정들 말이다. 양미니가 내게 언젠가 쌩뚱맞게 던졌던, '친구여, 자기개념통합을 이루고 오라' 던 그 말 뜻을 알 것 같다. 결론 없이 마무리 없이 글 쓰기를 여기서 마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