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

진로에 대한 고민

담연. 2016. 3. 1. 05:06

솔직하게 마음을 풀어내는 것은 참 힘든 일이다. 뚜렷하지 않은 생각들과 구름처럼 떠다니는 것 같은 묘한 감정들이 마음을 어지럽힐 때는 더더욱 그러하다. 괜시리 저녁에 마신 커피를 탓하며 잠에 쉬이 들지 못하고 시간을 죽이게 된다. 조금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보낸 저녁 시간을 돌아다 본다. 무슨 이야기를 했었던가, 주변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그러다 보면 결국 내가 가진 어떠한 '불안' 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요즘 읽고 있는 책의 내용을 떠올리게 된다.


알랭드 보통의 불안의 초반 부를 읽고 있다. 지위, status에 대한 불안부터 글을 풀어낸 그의 통찰력이 놀라웠다. 그래, 그의 말대로 계급사회였다면 자신의 지위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불만족감은 현대인이 경험하는 것만큼 크지 않았을 게다. 오히려 불변의 것에 대한 깔끔한 수용을 하고(아니 어쩌면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고) 그 위치에서 나름의 방향을 잡아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자유경제시대가 되고 민주주의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은 노력에 따라 지위를 바꿀 수 있다는 (헛된) 기대와 희망을 품은 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고 당장 즐길 수 있는 행복을 보류한 채 고통과 힘겨움을 인내한다. (물론 계급사회에서도 역시 그러하겠으나 그러한 행위의 이유가 다를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 사람들이 똑같이 고통 혹은 불안을 느끼더라도, 그것의 근본적이고 사회적인 원인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사실 의외로 그 지위에 대한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면서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계급사회에서처럼, 어떤 큰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말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일까.


나는 이 길을 걸어온 많은 사람들이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길을 찾아 각자의 행보대로 잘 걸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대체 그러한 힘들이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인지에 대해 공상에 빠진다. 하나씩 짚어내다 보면, 결국 내가 가지지 못한 것, 나에게 결핍된 무언가가 나의 레이더망에 포착이 된다. 이로 인한 씁쓸함이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일차적인 원인이다. 


그리고 나서는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렇다. 나는 아직 장기여행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는 거다. "하기로 한 건 해야 돼요." 라는 후배의 말에 위안을 얻었고 내 결정이 완전히 잘못되고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님을 인정 받은 후에 마음을 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 며칠 전, 꿈은 가슴이 뛰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여행이니 뭐니 하면서 가슴이 뛰지 않는 다면 도피성이라는 뉘앙스의 글을 보았고, 순간 "꿈은 현실이기 때문에 냉정하게 판단이 가능하고, 그래서 가슴이 뛰지 않을 수도 있는 거야, 흥" 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가, 찬찬히 나의 반응들을 돌이켜 보았다. 나는 걱정과 불안이 앞서고 있고, 이에 빠져 진취적으로 일을 진행하기가 어렵다. 현실도피가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아닌 부분이 분명 있다. 하지만, 도피인 것도 맞다. 


나는 어느 길로 흘러가야 할지 잘 모르겠다. 많은 선배들처럼, 그리고 주변 사람들 처럼, 여기 저기 여러 시도를 해보고 다양한 곳에서 일을 하다 보면 자신에게 맞는 일을 결국 찾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조급해 하지 않아도 됨을 알고 있다. 어차피 이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갈테고, 일은 예측가능한 범위 내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렇기에 도전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렵다. 그리고 대체 어디로 흘러 가야 할지 정말 잘 모르겠고, 이것 저것 해보기가 두렵다. 그래서 내가 잘 하고 있는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도 불명확하며, 남들에게 일어나는 새로운 이벤트에 대해 부러움의 시선만 가지게 된다. 그러다 쌩뚱맞게도 완전히 새로운 장기여행으로 눈을 돌리고 그것이 나를 구원해주리라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허세다. 내가 있어야 할 곳과의 긴 (그러나 잠시 동안의) 이별을 통해서 내가 가진 자부심과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떠난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허세가 가득하다. 새로운 경험과 인식을 넓히겠다는 미명 하에 현실에서 다양한 도전을 해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잠시 덮어두고 그러한 도전의 책임을 유예시키는 것이다. 도전할 용기도, 그렇다고 현실에 만족할 용기도 없기에, 엉뚱한 짓을 하는 것이다. 


때론 그러한 엉뚱한 점들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는 위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돌아온 후 분명 내가 지닌 그 시간의 간격으로 인해 괴로운 순간이 올 것이다.  남들보다 뒤처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빈털털이인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괴로움을 웃음과 즐거운 이야기로 덮어버리고 지나가려고 하는 비겁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게 가장 두렵다. 초라한 나. 돈도 변변한 자리도 가지지 못한 나. 나이만 먹고 전문적인 역량은 깡그리 까먹은 채 여기저기 방랑하다 돌아온 사람. 내가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을 가지게 될 사람들에 대한 질투와 불안과 우울. 그것이 나의 밤잠을 방해하는 두 번째 요인이다. 



 

잠이 온다. 

드디어..



그러한 마음을 붙들어 주는 것이 대체 뭘까. 똑같이 혼란스러워 하고 똑같이 방황하는데도 나는 너무 엉뚱하게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 저들이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이유는 뭘까. 다시 생각해 보아도, 나의 결핍된 부분들로만 그 이유를 채우게 된다. 투사의 힘이란, 상당히 강하다. 세상은 투사의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대단하다. 투사가 없으면 극적인 드라마도 없다는 그 책에서의 한 구절이 새삼스럽게 떠오르고 또 불안을 조장한다. 




이러나 저러나 나는 갈 것이고, 또 무척이나 가고 싶다. 

그래서, 제가 지치지 않게, 다녀온 후 열정과 사랑을 듬뿍 담은 채 돌아올 수 있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를 드리는 건가. 

갑자기 기독교인들의 기도행위가 이해가 된다. 108배를 하고 싶어진다. 


잠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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