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그 곳에 간 지 4일 째 되던 날.
Do nothing, Do everything you want.
빠이의 모토는 'Do Nothing' 이다. 철저하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왔는데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여유롭고 이 작은 시골 마을은 한적하다. 일일투어를 내세운 여행사가 군데 군데 있어서 어디어디 가는지 들여다 보기는 하지만 썩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유명한 유적이나 빼어난 경관과 같은 갈 곳이 별달리 없는 지역일 수록 일출과 일몰, 강가에서의 래프팅이나 물놀이, 약간 떨어진 곳의 산간 지형 등을 위주로 내세우는 것 같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안하려고 왔는데 굳이 저런걸 왜? 하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루 이틀만 묵으려 했던 이 숙소에서 계속 연장을 하였고, 낮에는 너무 더우니 해가 지면 살며시 나가 밥을 사먹고, 꼬지를 사먹고, 야시장을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러던 중 뭔가 심심해서 다음 행선지인 미얀마에 대한 공부를 며칠 째 하고 있다.
사실 나는 여행 전부터 어느 한 지역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나만의 가이드북 제작을 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만 하면서 정작 실천을 하지 않았다. 그 때 그 때 인터넷으로 접속하여 정보를 다 확인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거기에 투자될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으며 앞으로 많은 나라를 갈텐데 그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다 보려니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꼬박 이틀에 걸쳐 가이드북 정리를 한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을 들여 역작을 탈고한 기분 마냥 당장 미얀마에 가고 싶은 마음이 솟아 올랐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귀찮고 성가시고 어찌보면 별 의미 없는 짓이라도 이 곳에서는 그냥 하게 되고 뭘 하든지 간에 그냥 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어떠한 가치판단이 개입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였다.
그냥 지금 내가 있는 이 순간, 이 장소가 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고와 반추도,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계획과 걱정,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들에 대한 막연함과 불안감 같은 것들이 없다. 그냥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이 자체가 내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다. 누워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것. 손 끝으로 타자를 치고 있는 것. 흘러가는 생각을 따라 쫓아 가는 것. 배 속에서 느껴지는 공복감. 눈 앞에 보이는 카페 내부의 여러 장식들. 선선한 바람에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저 모습들. 노란 전구에서 오는 편안함. 가지런히 진열된 찻잔들. 그냥 여기가 온 우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
6일째. 인생에 대한 감정적이고 진지한 고찰을 하는 행위에 대한 단상
치열하게 나를 고민하고 삶을 반추하며 괴로움에 몸부림 치던 그 어린 시절에 여행을 떠났다면 지금과 다른 생각과 다른 느낌, 조금은 더 밝고 긍정적이며 희망적인 느낌을 가졌을까.
어떠한 무거운 고민과 고찰을 애써 하고 싶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그러면서 머리 속이 텅 비어있다. 나의 자유로운 생각과 고찰들이 정형화된 교육과 정해진 길을 따르던 길 위에서 박탈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8일째. 한국인 숙소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술에 취한 상태로의 메모.
즐거움과 쾌락은
ㅡ내면 성찰을 방해하는 허상인 것일까
ㅡ인생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원동력인 것일까
여행의 목적
ㅡ경험과 배움
ㅡ여유와 즐거움, 쉼
ㅡ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한, ?
ㅡ개인의 상황과 욕구에 따라 달라질 것이고
그 어느 것이 되든 상관 없는 것인데
내 생각에 대한 찬반을 거두고 생각 그 자체만을 들여다 본다면
나는
ㅡ여행 ㅡ> 경험 ㅡ> 나의 것, 과거의 경험과의 비교, 상황 성찰 ㅡ …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사람에 대한 거부감. 에라이
여행 경험을 나누는 것에서는 개인의 성찰과 관련된 내용은 썩 잘 언급되지 않는다.
그것이 빠져 껍데기만 드러나는 이들을 볼 때 섣부른 판단과 선입견은 좋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아 저 사람은 외부 자극에 대한 집중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 싫다 그냥 뭔가 좋은 느낌은 들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고 숨기는 방법 태도 스타일
여행의 패턴은
자신에게 필요했으나 결핍되었던 것에 대한 충족을 나타내어 준다.
사람
경험
지식
공부
즐거움
쾌락
쉼
고립
감정
투사의 힘
삶의 원동력
에너지를 방출하게 되는 방향
가족의 의미 = 시간과 적응과 융화
말이 많고 자기를 쓸데 없이 내세우며 우쭐해 하는 것에 대한 혐오. 적어도 반감. 불쾌.
그런 그들이 느껴지면 외면, 회피, 철수하게 된다.
아무튼 오랜만에 물놀이를 하고 온데다 수면이 부족했기 때문에 더 대화에 집중하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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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기 전에, 오래 알고 지낸 이로부터, 너는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이 부족한 사람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무시하는 태도를 강하게 드러낸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당시 술에 취해 많은 대화가 생각나지 않았는데, 다음 날 그 자리에 동석했던 이가 나에게 알려준 내용이었다. 나는 정말, 정말, 인간실격에서의 요조가 학교에서 존재감 없던 친구에게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행위의 본질을 간파당하였을 때 만큼의 충격과 '공포감' 을 느꼈다. 아니, 그게 드러났단 말인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었고 의식적으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려는 노력을 했었는데. 그 여파는 꽤 오래갔고, 일부러 그 사건과 말의 의미를 더 생각지 않으려고 상당히 노력하여 머리 속에서 밀어냈다.
그랬는데, 이 때 작성한 이 메모는, 그러한 나의 오만함을 여실히 보여 준다. 앞서 치앙마이에서 느꼈던 한국인들에 대한 불쾌감의 원인에 인간의 공포에 더하여 나의 오만함을 추가하여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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