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째.
한국에서의 11월은 한 해가 끝나감에 대한 아쉬움과 쌀쌀해진 날씨로 인한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허전함을 느끼는 달이었는데, 더운 날씨의 11월 이라니. 상당히 낯설다. 한 해가 마치 13월 14월로 주욱 이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이 한 해가 끝나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여행 초기인데다가 한 해를 정리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도 이유이겠으나, 날씨가 가장 큰 원인인 것 같다. 본능적으로 내 뇌는 '반팔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니는 11월이라니? 무슨소리야' 라고 말하며, 긴 소매와 긴 바지, 트렌치 코트, 스카프를 두른 채 쌀쌀한 아침공기를 마셔줘야 아 이제 연말이구나~하는 느낌을 느끼는 것 같다.
나는 아직도 생각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 한다. 펜을 들고 노트를 펼쳐 들어 한 문장을 썼다가, 다시 노트북을 펼쳐 키보드를 두드리기를 두 세 번 반복했다.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풀어 내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생각을 정리하는 척, 내 생각을 가지고 있는 척 하며 살아왔음을 느낀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이기도 하고, 치열했던 아니 열악했던 20대를 보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나의 생각을 믿지 않고 하찮게 여겨서 이기도 하고, 내가 논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은 빠이에서 1주일 넘게 머무는 중이고, 이 곳 한인 숙소인 심향에서는 3일 째 되는 날이다. 예정대로라면 내일(금) 치앙마이로 되돌아가서 미얀마 비자를 신청해야 하는데, 애석하게도 미얀마 영사관은 월, 화, 수요일만 오픈을 한다(구글맵의 정보에 따르면). 우리는 이 사실을 오늘 오전에서야 알게 되었고(분명히 예전에 봤었는데 새카맣게 잊고 있었다) 결국 예약해두었던 치앙마이행 버스와 이 곳에서의 체류를 5일 더 연장하였다. 치앙마이는 현재 등불 날리는 축제를 앞두고 전반적으로 숙소값이 상당히 상승해있기 때문이다.
이 곳 빠이는 'Do Nothing in Pai' 이라는 별칭답게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작은 동네이다. 실로 이 곳에는 장기투숙을 하는 이들이 꽤나 많다. 물가가 저렴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테고, 경쟁도, 서두를 것도, 복잡할 것도 없는 정말로 베이직 심플 라이프를 실천하기에 적절한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지리적으로도 대도시인 치앙마이에서 두 시간도 채 떨어져있지 않지만, 이 곳에 오기위해 거쳐야 하는 칠백 몇 십개의 구불구불한 산길과 높은 산들이 켜켜이 둘러 쳐져 있기에 속세와는 동떨어진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은연 중에 느낄 수 있기도 하고.
무튼 우리 역시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일명 빠이에서 꼭 가봐야 하는 유명한 장소는 거의 대부분 가지 않았다. 단지 읍내 또는 워킹스트리트(walking street)에서만 돌아다니며 음식점을 기웃거리고 야시장을 기웃거린 게 다였다. 그러다 이 곳에서 장기로 머물고 계시는 어느 분(ㅡ후에 우리가 태국 비자를 꽉 채울 때까지 빠이에 머물게 만든 장본인ㅡ)의 추천을 받아 숙소에서 7km 떨어진 곳에 있는 Pai Hotspring Spa Resort에 어제 오늘 다녀왔다. 그 곳은 커다란 swimming pool과 온천수를 끌어와 마련해둔 작은 spa가 잘 마련되어 있는 리조트로, 외부인도 1인당 100B(약 3천원 가량)을 내거나 10회에 500B(만오천원) 하는 쿠폰을 끊어서 이용할 수 있다. 아마도 앞으로 우리의 빠이 생활은 수영, 스파->점심 햄버거 또는 팟타이->빈둥빈둥->숙소에서 저녁 후 취침이 반복될 것 같다.
가급적 한인 숙소에서 머무르는 것을 기피해왔었다. 그러다 이 곳에서 매일 밤 여행자들과 만나 늦게까지 맥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에 대한 상당히 양가적인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 좋은 점은, 어울려서 경험을 나누면서 정보를 얻고, 생각을 일으키는 자극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점은 내 개인적인 시간이 줄어든다는 점과 '내'가 자꾸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자꾸 느껴진다는 것에 대해서도 양가적인 감정이 드는데, 그런 나를 다르게 변화시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 경험의 장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나를 느끼고 직시하는 것이 불쾌하다. '그러한 나' 라 함은, 말주변이 없고 사람을 판단하고 하는 등등 즉 '사람들 속에서의 나'와 '그런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통합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될 것 같다.
13일째.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어색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물론 아주 사교성이 뛰어난 외향형의 사람이라면 아닐 수 있다. 나는 극도의 내향적인 사람이고, 어느 정도 가까운 이들, 이를 테면 한 직장에서 몇 개월 간 일을 함께 해오면서 일상을 공유한 사람들이라도 함께 식사를 하거나 간식을 먹을 때 어색함을 느끼는 지라, 여행 중 숙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어색함은 불을 보듯 뻔하다.
여행자들을 처음 만나면 상대방이 먼저 밝히지 않는 이상 약간의 불문율처럼 선뜻 묻지 않는 질문이 있는데, 몇 살이냐, 여행 오기 전 무슨 일을 했었느냐 하는 것 등이다. 어느 정도 친해진 이후 아주 조심스럽게 묻는 경우도 있지만 더 자세히 묻지는 않는다. 대신 대화 중 은연중에 드러나는 팁들로 그 사람의 과거에 대해서 머릿 속으로 조각을 맞춰간다. 종종 인사를 채 나누자 마자 신상파악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럴수도 있지 뭐, 하면서도 불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어쨌든 내 마음 속에서도 그의 전공은 무언지, 아니면 문과인지 이과인지, 직업은 무엇이었는지 등 그 사람을 객관적인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것을 묻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불편한데, 그 이유는, 내가 바로 그런 기준들로 나와 맞는 사람인지를 판별하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점은 균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상대의 기본 정보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다. 그런 균은 나에게 '직업병'이라고 하지만, 나는 내 성향이라고 말하고 싶다.
16일 째.
느즈막한 아침을 먹고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편의점에 가면서 이 곳 숙소에서 스님의 눈치를 보며 얹혀 살고 있는 멍멍이들 막걸리, 누룽지, 트럼프와 동행하였다. 나를 마치 무사처럼 호위해주는 아이들 덕분에 마음이 매우 든든하고, 여기가 우리 동네 같고, 마치 내 시키들 같고, 그랬다.
골목골목길을 지나 큰 길로 나서자 많은 차와 바이크들에 놀랬는지 가장 몸집이 작은 트럼프가 기겁을 하며 도망을 갔다. 우리가 왔던 방향으로 도망을 간 것 같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편의점에 들어가니, 문 밖에서 누룽지와 막걸리가 편의점 안쪽을 빤히 쳐다보며 우리를 기다렸다. 한참을. 특히 막걸리는 우리에게서 시선을 한시도 떼지 않았다. 뭐랄까. 세상에 그보다도 더 끈끈함은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마치 예전 살았던 까미와 방울이와 릴리와 나누었던 그런 눈빛이랄까. 뭐ㅡ 막걸리는 먹을 걸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더 앞섰을지도 모르겠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트럼프가 보이질 않는다. 집에까지 갔다가, 편의점까지 누룽지와 막걸리를 데리고 한 번 더 다녀오면서 트럼프를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어디서 사고가 났나 모르는 골목길로 접어들어 길을 잃었나 싶어 안절부절. 스님은 올 것이다, 안와도 시끄러운 녀석이 사라졌으니 잘 된 것이다, 라며 말씀을 하시는데 내 마음은 동생을 잃어버린 것 마냥 좌불안석 안절부절이었다.
침대에서 좀 쉬다가 불현듯 한 번 더 찾으러 가봐야겠다 싶어 균에게 바이크를 태워달라고 했다. 골목 모퉁이를 두어번 돌아서니 저 멀리서 자그마한 연갈색 개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미친듯이 달려온다. 정말 미친듯이 방방 뛰어 오르며 난리법석을 부린다. 지도 놀랬던게지. 얼마나 놀랬을까. 기쁜 마음에 함께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리조트에 수영겸 스파를 다녀왔다. 하루가 알찼다.
저녁에는 한인 뮤지션분이 하는 라이브 공연까지 보고, 이 곳에서 장기로 머무시는 여럿 분들, 여행자분들을 만나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빠이에서의 장기라 함은 적어도 비자런 한 번쯤은 우습고 1년도 기본인 것 같았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 여행자도 아닌 현지인도 아닌 그 야릇한 아우라. 정규분포곡선에서 한참 벗어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생각에, 묘한 흥분감이 느껴졌다. 내가 알고 있는, 내 주변에서 흔히 보이는, 정해진 길을 따라 정해진 틀에 맞추어 아둥바둥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무언가로부터 일탈하여, 아니 약간 다른 방향과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극도의 정규분포에서도 정중앙에 속한(ㅡ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으나 그들에 비해서는ㅡ) 내가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겠나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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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때 쯤이지 싶다. 치앙마이로 가는 버스를 예약했다가 날짜를 한 번 미루었는데, 최종적으로 떠나야 하는 날 바로 전날에 문제의 장기수 두 명과 술을 마심 이야기를 나누다 '가지 말라'는 농반 진반인 그 말에 마음의 한 조각이 붙들렸고, 결국 다음 날 우리는 버스를 타지 않았다. 그는 균과의 궁합이 좋았고, 좋은 느낌을 조금이라도 더 공유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때부터다. 여행이 아닌 진정한 일상의 맛을 본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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